dt\pen\1.htm
베르람의 베이컨
대혁신의 머리말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것에 관해서는 이것이 단지 사견의 표시로 보아 지지 않고 정대한 일로 보아 지기를 바란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한 학파의 창립이나 우연의 착상을 변호함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복리와 존엄 일반의 확립이 문제인 것을 세인이 믿어줄 수 있다.
다음에 각인이 그 자신의 최상 이익 중에서 공동의 복지를 돌보며,이런 고려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각인이 우리의 혁신에 대해서 믿어도 좋은 것은
그것이 무한한 것.초인간적인 것을 전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혁신이야말로 한없는 착오를 종결 짓는 동시에 그러한 착오의 의당한 한계를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판의 머리말
[1 재래 형이상학의 형편]
1)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 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문제가 이성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과(課)해져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2)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곤경에 빠지기는 하되 그 책임은 인간의 이성에 있지 않다.
이성은 원칙들에서 출발하고 이 원칙들은 경험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반드시 사용되는 동시에,경험이 원칙들의 사용을 충분히 실증하고 있다.
이성은 이런 원칙들에 의거해서 보다 더 기원적인 제약들에 이르기까지 항상
소급하여 간다.(이 처름 소급하는 것은 이성의 본성의 소치이다).
그러나 문제가 종식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래서는 이성의 탐구적 활동이 언제까지나 완성되지 않음을 이성은 깨닫는다.
하기에 이성은 모든 가능한 경험적 사용을 넘었으면서도
보통의 상식과도 일치할 만큼 확실한 듯한 원칙들에 도피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이성은 혼미와 모순에 빠진다.
이 혼미와 모순에 기인해서 그것의 밑바닥에 오류가 숨겨져 있음을 간파할 수 있기는 하나,
그러나 그런 오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성이 사용하는 원칙들은 모두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고로,
그것들은 경험의 시금석을 이미 승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름 한이없는 논난들을 벌이는 싸움터가 형이상학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3)형이상학이 만학의 여왕이라고 불려진 때가 있었다.
의욕을 곧 행동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형이상학은 그 대상이 특히 중요하기 때문에 여왕이라는 존칭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에 갖은 모욕을 표시하는 것이 이시대의 유행이 되어서,
형이상학의 노녀는 추방되고 버림을 받아 헤쿠바처름 탄식하고 있는 중이다.
즉 나는 "최근까지도 만인 중에서 제일 가는 권력자였고
매우 많은 아들과 사위에 떠받친 지배자 였건만,이제는 나라에서 추방되어 의탁할 곳 없이 버려졌다"고
4)시초의 형이상학의 통치는 독단론자의 지배 아래서 전제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법에는 아직도 옛날 야만성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입법은 내란으로 인해서 점차로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타락하였다.
회의론자는 정착적인 개간을 싫어하는 유목민과도 같아서
가끔 시민적 단합을 파괴하였다.
다행하게 회의론자의 수가 적었기에,
이들은"독단론자들이 일치한 계획에 따른 것은 아니나
항상 새롭게 형이상학을 개척하려고 했던 것"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근대에 와서 (유명한 록크의)인간 오성에 관한 일종의 생리학은
일단 전래의 모든 분쟁에 종말을 고해서,형이상학이 하는
주장의 합법성 여부를 단연 결말짓는 듯 싶었다.
그러나 밝혀진 결과란 것은,자칭 여왕의 본 출신은 보통의 경험이라고 하는 천민이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여왕이라는 잠칭은 당연히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록크가 형이상학에다 경험론의 계보를 덮어씌운 것은 사실은 잘못이었다.
이 때문에 형이상학의 주장들은 여전히 유지되어 왔고,
이런 유지를 통해서 만사가 또다시 낡은 보잘 것 없는 독단론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런 까닭에 학적 형이상학이 형이상학이 모면하려고 했던 멸시에 부닺힌다.
(세인이 믿었듯이) 모든 방도를 시험해 본 셈이었으나 허사였던 당대에 있어서는,형이상학에
있어서 권태와 극단의 무관심주의가 지배적이다.
이것은 모든 학문에 있어서의 "혼돈과 암흑"의 모체이기도 하되,
부당한 열성이 학문을 불명하게 하고 혼란케 하며 무용하게 했을 즈음에는,
동시에 장차 학문을 개조하고 계몽하는 원천이 되는 것이요,적어도 그것의 서곡이기도 하다.
[11 순수이성비판의 필연성]
5)인간의 본성이 무관심일 수 없는 대상의 연구에 관해서
억지로 무관심인 척 하더라도,그것은 무익한 일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자칭 무관심주의자들이 학술 용어를 통속적인 어조로 변경함에 의해서
아무리 자기네의 정체를 변장하려고 해도,
그네들이 일반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기만 하는 동안 자못 경멸한다고 외쳤던 형이상학을
다시 주장하는 데에 그들은 귀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온갖 학문들이 번창하는 그 마당에서 생긴 무관심,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그 지식을 되도록이면 포기하지 않았던 그런 학문에 관한 무관심도,
주목하고 반성해 볼 만한 현상이다.
무관심은 명백히 경솔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이비의 지식이 속일 수 없는 당대의 성숙한 판단력에서 생긴 것이다.
무관심은 사실은 이성에 다음과 같이 호소함을 의미한다.
즉,이성이 하는 모든 일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자기인식]의 일에 새로이 착수하여
하나의 재판소를 설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재판소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성을 보호하는 것이요,
반대로 모든 부당을 강권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영구불변적 법칙에 의해서 제거할 수 있다.
이런 재판소가 다름아닌 순수이성의 비판 그것이다.
*현대 사고방식의 천박성과 근원적 학문의 쇠퇴에 관한 탄식을 우리는 가끔 듣는다.
그러나 수학과 자연학[물리학]처름 그 기초가 튼튼하게 확립되어 있는 학문이,
이러한 비난을 조금이라도 들을 만 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러한 학문들은 도리어 견고하다는 고래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을 나는 본다.
자연학에 있어서 이점은 이전보다도 더구나 더 탁월하다고 본다 --페이지 21
그 외 종류의 인식[형이상학]에 있어서도,애써서 우선 그 인식의 원리들이 수정된다면,
같은 견고한 정신의 활동이 증명되겠다.
이러한 수정이 없을 무렵에는 무관심과 회의와 최후로 엄밀한 비판이 도리어
근본적인 사고방식을 증명하는 것이 되겠다.
현대는 전 적으로 비판적 시대요,만사는 이런 비판에 붙여져야 한다.
종교는 그 신성성에 의해서,입법은 그 위엄에 의해서
보통 비판을 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때에 종교와 입법은 당연히 의혹을 일으키는 것이요,
거짓 없는 존경을 요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성은 그의 공명정대한 검토를 배겨 낸 내용에 대해서만
거짓 없는 존경을 허용하는 것이다.
6)그러나 <비판>이란, 책들과 체계들의 비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이성의 능력
일반>의 비판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비판은,이성이 모든 경험에서 독립하여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인식에 관해서이다.
따라서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 여부에 대한 결정.가능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원천.범위,한계 등의 규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을 나는 [가설이나 억측이 아닌] 원리들에 기본 해서 수행한다.
7)나는 남겨진 이 유일한 비판의 길을 채택하였다.
이 유일한 길에 의해서,재래에 경험을 떠난 사용 때문에 이성에다 모순을 일으켰던 모든 과오를 잘 제거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인간 이성의 무력을 구실삼아 이성의 물음들을 회피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성의 물음들을 <원리들>에 따라서 완전히 분류하였고,
이성이 자신에 대해서 오해한 점을 발견한 뒤에 이성이 완전히 납득할 만큼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철학의 의무는 곡해에서 생긴 속임수를 없애는 데에 있었다.
비록 이 때문에 매우 찬미되고 애호된 환상이 멸망하기에 이르더라도 개의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에 종사함에 있어서 면밀함을 가장 노렸다.
그래서 형이상학의 과제이면서 여기서 해결되어 있지 않거나 적어도 해결의 열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과제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 감히 말한다.
순수이성은 사실상 하나의 원전한 통일체이다.
그러므로,이성의 원리가 이성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게 과해진 모든 문제들 중의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불충분하다면,이런 원리는 언제라도 내던져 버려도 좋을 것이다.왜냐하면,만약 그러하다면
그런 원리는 그 외의 다른 어느 문제에 대해서도 전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해결한 만한 힘이 못 미치겠기에 말이다.
8)이러한 말을 하는 중에 얼른 보아서는 자못 과장되고 불손한 나의 주장에 관해서,
경멸이 섞인 불쾌한 표정을 짓는 독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하는 주장은, 마음[영혼]의 단순성이나 세계의 맨 시초의 필연성 같은 것을
증명한다고 자칭하는 통속적인 계획을 세운 모든 저자들의 주장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온당한 주장이다.
무릇,보통의 저자들은 가능한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인간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을
약속하는데 반해서,나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바요,
그 대신에 오로지 이성자신과 이성의 순수한 사고를 다룬다는 것을 겸허하게 고백한다.
이성과 그 순수한 사고는 내 자신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에,그런 것들의 주도한 지식은
먼 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성의 모든 단순한 작용들이 완전히 또 체계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에 관한 실례를,
일반논리학[형식논리학]이 이미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는 일반논리학과는 달리
아래와 같은 문제가 던져졌을 뿐이다.
즉,나로부터 경험의 모든 재료와 조력이 제거되었을 때에,
<내가 이성에 의해서 얼마만한 일을 수행한다고 기대해도 좋은가>하는 문제이다.
9)하나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의 완전성과 모든 목적을 개괄해서 달성하는 면밀성,
이 두 가지는 임의의 기획이 우리에게 과하는 일이 아니라
인식자체의 본성이 우리에게 과하는 일이요,이것에 관한 진술은 이만 이 정도로 한다.
위의 언급 들은 우리의 <비판적 연구>의 실질[중요문제]에 관한 것이다.-----페이지23
1선험적 원리론
11선험적 감성론
111공간론
112시간론
12선험적 논리학
121선험적 분석론
1211개념의 분석론
12111오성의 모든 순수한 개념을 발견하는 실마리
121111오성의 논리적 사용 일반
121112판단에서의 오성의 논리적 기능
121113오성의 순수한 개념--->범주
12112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121121선험적 연역일반의 원리
범주가 선험적 연역에로 건너감
121122경험을 가능케하는 선천적 근거
121123대상일반에 대한 오성의 관계와 대상의 선천적 인식 가능성
1212원칙의 분석론(판단력의 선험적 이설)
12121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도식성
12122순수오성의 원칙의 체계
121221모든 분석적 판단의 최상원칙[모순율]
121222모든 종합적 판단의 최상원칙
121223순수오성의 종합적 원칙 전체의 체계적인 표시
1212231직관의 公理
1212232지각의 豫料
1212233경험의 類推
1212234경험적사고 일반의 요청
12123모든 대상일반을 현상체와 가상체로 구별하는 근거
반성개념의 모호성
122선험적 변증론
1221순수이성의 개념들
1222순수이성의 변증적 추리
12221순수이성의 변증적 추리
122211순수이성의 오류추리
122212순수이성의 이율배반
122213순수이성의 理想
2선험적 방법론
21순수이성의 훈련
211독단적 사용을 할 무렵의 순수이성의 훈련
212논쟁적 사용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
--->모순에 빠진 순수이성을 회의론에 의하여 만족시킬 수없음
213가설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
214증명에 관한 순수이성의 훈련
22순수이성의 규준
221우리이성의 순수한 사용의 최후목적
222순수이성의 최후목적의 규정근거인 최고선의 이상
223억견,앎,신앙
23순수이성의 건축술
24순수이성의 역사